그녀가 소년을 다시 만났는지 말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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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듯 책을 본다/다음호를 기다리며

[클럽 창작과비평] 『창작과 비평』 2020봄호 논단/현장/산문 읽기

열낱백수 2020. 5. 16. 15:03

   계획보다 한 주 늦게 '평론/논단/현장/산문'을 읽게 되었다. 

   주말이니 평소보다 조금 느지막히 일어나 어제 친정엄마가 주고가신 토종닭으로 닭갈비를 해보았다. 남편과 점심을 먹으며 YTN 실시간 뉴스를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보는데 이틀 앞둔 5·18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3년전 취임 8일만에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하지만 그 전 4년동안 대통령이 5·18 기념식 참석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여전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5·18는 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는 과거인 것이다. 얼마전 나이에 비해 너무도 건강해보이는 (통장에 29만원 있다는) 그는 재판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또한번 뉴스에 얼굴을 비쳤지만 본인의 잘못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누가 군인들에게 총과 칼을,곤봉을 쥐어주고 무고한 시민들에게 폭행과 발포를 지시했는지 알 수 없다. 가해자를 아직 찾지 못하였으니 누군가는 '그동안 할 만큼 했다' '지겹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5·18를 놓아주지 못하고 단순히 추모만 할 수 없는 이유다.

   현장 '다시 5·18을 묻는다'에서는 광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시한번 짚어준다. 5·18를 재구성하는 부분에서는 감정적이지 않은 문체임에도, 팩트의 나열임에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얼마전 우리삶에 불어닥친 코로나19도 그렇지만 5·18항쟁은 국민들에게 무엇보다도 '국가란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고 글쓴이는 적고 있다.(390P) 혹시 이미 지나간 (내가 잘 모르는, 학교 역사책에서만 배운) 역사란 이유로 5·18을 외면해왔다면 이 글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우리가 여전히 5·18를 붙들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제때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왜곡한다. (380P)

   사실 요즘같이 나와 내 가족 먹고 사는 것 신경쓰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나와 전혀 다른 세상 일인 것만 같은 일들까지 신경쓰고 살기가 쉽지는 않다. 김중미 작가는 산문 '특권과 공정 사이'를 통해 조국의 자녀들이 누린 특권에 대해 분노한 것은 고졸 청년, 혹은 지방대 학생들 보다 이른바 '스카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공부방을 꾸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작가는 공부방에서 인연을 맺은 디귿이와 리을이라는 두 아이와, 같은 공부방에서 공부는 했지만 공동체 부모를 둔 기역이와 니은이의 19~20세를 지켜보며 그 차이가 분명 존재함을 말한다. 

자신들은 능력이라고 믿는, 그래서 공정하다고 믿는 '실력'이라는 것이 어쩌면 남보다 많이 누릴 수 있는 '기회'덕분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다.(394P)

   나는 어떠한가. 나도 마찬가지다. 백수 주제에 주말 오후 계간지나 읽으며 블로그에 글을 끄적일 여유따위 있다는 건, 내 능력과 실력이 이 여유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금·은수저는 못되어도) 부모님이 나를 양육할 때에 만들어준 교육적·문화적 환경이 생계에 떠밀려 대학진학을 꿈도 못꿀 아이들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요일부터 남편의 명의로 된 체크카드에 60만원의 포인트가 적립되었다. 국가에서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국민들에게 주는 재난지원금이라고 한다. 이 국가재난지원금을 주는 것이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는지 아닌지, 모든 국민에게 주어야 하는지 선별해서 주는 게 더 좋은지, 금액은 얼마가 적당한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은 모든 국민에게 (단 기부가 가능하도록)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러면서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도 조금씩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논단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에서 애런 베너너브가 주장하는 것은 자동화론자들의 주요 제안인 보편적 기본소득이 그들의 주장대로 실효성을 가지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기술에 의한 일자리 파괴'가 원인이어야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사회는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일자리 창출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자리 없는' 미래가 아닌, '좋은 일자리가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그는 탈결핍의 지구를 출범시키기 위해 싸울 것을 촉구한다.(355P) 물론 탈결핍이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다. 특히 탈결핍의 미래를 향한 집단적 전진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인 '생산의 정복'은 자본가들로부터 투자결정을 통제하는 능력을 빼앗고, 자본파업을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을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탈결핍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사회적 투쟁이 없다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주의자는 기술 유토피아의 신비주의자에 불과하게 될 것'(378P)이라는 말이 결코 터무니없는 말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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