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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듯 책을 본다/다음호를 기다리며

[클럽 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2020여름호 특집 읽기

열낱백수 2020. 7. 12. 23:57

    여전히 요즘도 나온다는 <삼국지>라는 게임을 밤새도록, 그리하여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중원의 주인이 되고나면 잠도 못자 피곤해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해도 왠지 뿌듯한 느낌을 느끼며 그날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다고 현실의 내 방이 1cm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학교 내 책상 역시 1mm도 변함없었다. 게임은 게임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요즘 게임도 100퍼센트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 게임을 하려면 (현실의) 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 게임을 사기 위한 비용이 아니다. (그건 예전에도 있었다.) 소위 템빨이 좀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게임에 매진(?)하여 아이템을 많이 모으면 (현실의) 돈을 받고 팔 수도 있다. 

   꼭 게임만 그럴까? 언제부터인가 가상과 현실 사이에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은 화폐인가 아닌가.) 그 경계선은 우리가 직접 만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거래를 하면서 더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대면보다 온라인이, 전화보다 메시지가 더 편해지고 현금보다 카드-그 마저도 실물이 아닌 휴대폰상에서 생성한- 로 결제하는 시대에 도대체 어디까지가 확실한 '실제'인가.

   언제부터인가 시가 현실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덜 아름답거나 세련되지 못하다'고 평가받기 시작했다. 꼭 문학은 '있음직한' '또 다른'세계여야만 하는가. 이 시대의 화두를 공명하며 같이 갈 수는 없는가. 어짜피 지금의 현실은 누구도 있는그대로 그려낼 수 없고 그리는 사람마다 다를 것인데.

   이것에 대한 고민은 시인들도 하나보다. 조대한은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에서 '완고하게 분리된 현실과 시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겹쳐놓으며 현실과 안전거리에 있던 당시의 미학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세 편의 글 중 마지막에 놓인 이 글이 '시'를 다루고 있어 읽기 전엔 가장 거리감을 느꼈다. (시는 나에게 항상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가장 흥미로웠음을 말하고 싶다. 글쓴이는 이 분투하는 시인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기대어 다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것은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비추어 바라는 모습대로 나를 동작시킨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나는 '시의 "좋음"이란 작품 내의 아름다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실의 선함이기도' 하길 바라는 그 '어떤 이'의 한 사람이기에 시인들의 분투를 적극 환영한다.

   물론 코로나 시대와 연결지어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던져놓은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도 재밌게 읽었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나혼자' 손 잘 씻고 마스크 잘 쓴다고 병에 안걸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다. '불가피한 상호의존관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려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 의존성을 거부감없이 이 사회에 녹여내려면 '돌봄'과 함께 '느슨한 연결'의 기획에 답이 있음을 제시하는 글이다.

   반면 「혁명의 재배치」는 내게는 반은 공감을, 반은 생각의 다름을 느끼게 한 글이었는데 그럼에도 "존재를 결정짓는 어떤 연속적인 패턴은 이를테면 존재의 짜임새로서의 체질이라 하겠는데, 이때의 체질은 타고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습득한 것이다."라는 말은 적극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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