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소년을 다시 만났는지 말해줄래?

[책/003] 강영숙 『라이팅 클럽』 민음사, 2020 본문

꽃을 보듯 책을 본다/책의 비망록

[책/003] 강영숙 『라이팅 클럽』 민음사, 2020

열낱백수 2020. 8. 17. 10:51

   이 소설은 서술자인 '나(영인)'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끌고간다. 그런데 그 회상이 얼마나 쿨내가 풀풀 진동하는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유머러스함은 자신을 '너무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영인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쿡, 웃게 되는 식이다. 이제부터 고등학교 졸업 후 점점 살집이 불어난데다가 독특한 취향으로 미용실에 가서 아줌마 파마를 요청한 영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주인공인 '영인'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야 '엄마'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도대체 이 엄마는 그동안 딸을 (친척집도 아닌) 친구집에 놓고 뭘 하며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친밀감이란 1도 없는 모녀는 한 노부부의 집에 딸려있는 방에 세들어 살게 되는데 영인이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김 작가'라 부르는 차가움도 이해가 될 만하다. 

 

   엄마는 김 '작가'였다. 방이 딸린 가겟방에 그 많고많은 업종 중에 '글쓰기 교실'을 열었다. 엄마는 글을 쓰는 듯 보였고 종종 영인은 엄마의 글이 적힌 노트를 훔쳐보았지만 영인이 보기에 그 글은 허접스러워 보였고 한 잡지사의 문학상에 김 작가의 글이 뽑혔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잡지사는 상금을 주는 대신 오히려 잡지를 몇 십부 사는 조건으로 등단을 시켜주었다. 게다가 연애하던 '장'과 온집안 물건 다 던져가며 싸우는 이별장면이란.... 과연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엄마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어갈 땐 여지없이 난 영인의 편이었다. 모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김 작가에게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고 굳세게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는 영인에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응원의 힘도 실어주고 싶었다. 대학진학 포기, 희생만을 당요당하는 노동현장, 찌질했던 연애, 순간의 선택으로 결정된 미국행으로 이어지는 영인의 삶이 결코 녹록해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삶의 고됨을 토로하는 대신 치열하게 글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미국에서 '라이팅 클럽'을 만든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갈 수록 내 마음 한 켠엔 '영인이 이토록 굳세게 두 발로 딱 서있을 수 있는 힘에 김 작가의 영향도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력 짱짱한 집안에 태어나 영인과 똑같이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자신 내면으로 점점더 침잠해 들어가는 영인의 친구 K의 상황을 지켜볼 때면 더욱 그랬다. 

 

   결국 영인이 작가가 된 건 아니었다. (지금쯤은 글을 계속 써서 작가도 되었을까.) 하지만 조금 더 편안해 보였고 행복해 보인다. 대신 정말 김 작가는 작가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전에도 김 작가는 작가였다. 어쩌면 영인도, 그리고 무언가를 계속 쓰기를 갈구하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모두 작가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보면 많은 사람들이 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산다. 매일 저녁 남기는 일기가 힘든 삶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읽고 쓴다.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오후 3시는 누구나 후줄근해지는 시간이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 그리고 '난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신빵이다.' 생각하며 살아. 뭘 하든 우울해하지 말고.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널 낳았으니까. 하루에 한 번씩 그걸 생각해야 한다. (336면)

   김 작가가 영인에게 써준 편지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거울을 보니 아침에 개운하게 씻었던 얼굴은 이미 땀 범벅이고 하루에 대한 의지도 시들해지는 오후 3시 무렵이 되면 『라이팅 클럽』 김 작가가 떠오를 것이다. '그래 오후 3시는 누구나 후줄근해지는 시간이니까 거울 속 내가 후줄근해보여도 우울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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